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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의 탄생
1834년 제임스 버스비는 뉴질랜드 북부에 있던 추장들에게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국기를 만들라고 얘기하게 됩니다. 1835년에는 마오리족 사람들에게 뉴질랜드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하도록 독려했으며, 그들의 정체성을 확립시켜 주고, 뉴질랜드만의 독자적인 정부를 형성시켜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약 34명의 마오리족 추장들은 뉴질랜드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하였으며, 영국의 윌리엄 4세에게 이를 지지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챨스 히피의 웰링턴 항구
영국은 윌리엄 홉슨을 뉴질랜드로 파견했습니다. 이는 마오리족 족장들에게 동의를 구하여, 뉴질랜드가 자체적인 주권을 획득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뉴질랜드는 호주의 뉴사우스웨일스 주지사의 관할권에 속하게 되어 쉽게 통치가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윌리엄 홉슨은 8월 말 즈음 영국을 떠나 뉴질랜드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뒤이어 이민자들이 뉴질랜드에 가기 위해 배를 타게 됩니다. 윌리엄 홉슨이 마오리족 족장들을 모두 설득했다라는 소식이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뉴질랜드가 앞으로 개발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이러한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윌리엄 홉슨은 1840년 1월 29일 아일랜즈 베이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새로운 정착민들을 실은 오로라호가 웰링턴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윌리엄 홉슨과 이민자들은 서로의 도착사실을 몰랐지만, 각자의 소명과 꿈을 가지고 저마다의 길을 개척하게 됩니다. 특히 이민자들 가운데 윌리엄 웨이크필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대대적으로 토지를 매입하기 위해 쿡 해협 지역에 회사를 설립하려고 했습니다.
와이탕이 조약
아일랜즈 베이에 도착한 지 며칠 후, 윌리엄 홉슨은 제임스 버스비를 비롯해, 에드워드 윌리엄스, 선교사 헨리, 여러 영국 이민자들의 도움을 받아 와이탕이 조약의 초안을 만들게 됩니다. 이 조약은 제임스 버스비라는 사람의 집에 모인 마오리족 족장들에게 공개되었으며, 이 문서에 담긴 내용 하나하나를 살펴보기 위해, 약 40명이 넘는 족장들이 오랜 시간 동안 논의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40여 명의 족장들이 와이탕이 조약에 서명을 하게 되고, 이는 전국에 퍼져있던 약 500명의 마오리족 사람들에게 조약에 서명하도록 장려하는 계기가 됩니다. 1840년 말이 되자, 뉴사우스웨일스 주지사가 뉴질랜드를 통치하는 대신, 윌리엄 홉슨이 직접 뉴질랜드를 관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그를 총독으로 임명하였으며, 뉴질랜드는 이렇게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오리족 족장들이 이 조약에 서명을 한 이후, 여기저기에서 논쟁과 반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영어로 된 조약과 마오리족 언어로 된 조약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국 측은 마오리족 족장들이 와이탕이 조약을 통해, 뉴질랜드의 주권을 양도했다고 주장했지만, 마오리족 족장들은 그런 의미로 조약에 서명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오리족은 뒤늦게 자신들의 생각과는 다른 의도로 조약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심한 분노를 일으키게 됩니다. 1843년 와이라우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영국 이민자 중 22명이 사살되게 됩니다. 영국인들은 이를 대학살이라고 부를 만큼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며, 이에 대한 어떠한 조치를 취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1846년 뉴질랜드 지도자들은 약 1만 3천 명의 뉴질랜드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해, 일종의 대표 정부를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새로운 주지사였던 조지 그레이는 이민자들이 마오리족을 위해 법을 만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으며, 이러한 정부의 설립을 조금 늦춰출 것을 원했습니다. 마오리족을 보호하기 위한 정부를 설립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영국 이민자들은 수많은 탄원서를 제출하였으며, 이에 대해 항소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오리족이 영국인들을 대량학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어떻게 그들을 대변하는 정부를 영국 정부가 세우려고 하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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