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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체성
1886년이 되자 뉴질랜드에 거주하고 있는 비마오리족의 인구수가 상당히 증가하게 됩니다. 이들 중 새로 태어난 아기들이 많아지자, 뉴질랜드인이라는 개념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뉴질랜드인이라고 하면 보통 마오리족을 칭했었지만, 이제는 이민자들과 그들의 2세, 3세들을 통칭하게 된 것입니다. 뉴질랜드는 아직까지도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제국주의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영국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뉴질랜드는 나날이 성장해 갔으며, 뉴질랜드인들의 영국에 대한 신뢰도 또한 커져갔습니다. 영국인들의 2세, 3세들은 자신들이 영국인이라 자칭하며, 영국을 그들의 고향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1899년 남아프리카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영국군을 지원해 주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제2차 영국 보어 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뉴질랜드에 있던 영국인들은 영국군을 지지하기 위해 전쟁터로 나갔던 것입니다. 뉴질랜드 군대가 전쟁을 위해 새로이 조직되어 해외로 나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영국 또한 뉴질랜드 군대를 반겼으며, 그들을 자신들과 똑같은 형제로 여겼습니다.
호주 연방의 제안 거부
1901년 호주에서는 연방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때 호주는 뉴질랜드를 여섯 번째 주로 종속시키고자 하였는데, 뉴질랜드 정부는 이를 거부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뉴질랜드 자체의 정체성 및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도 있지만, 해외 연방정부가 뉴질랜드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 없이 마음대로 뉴질랜드 사회를 어지럽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뉴질랜드 정부가 노력해 온 많은 일들이 호주 연방에 귀속됨으로써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뉴질랜드 정부와 시민들은 뉴질랜드가 앞으로 계속 성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독립된 국가로써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새로운 국기를 제정하고, 법률을 만듦으로써 제대로 된 국가로써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1907년까지도 뉴질랜드는 영국의 영토로 머물러 있었으며, 어떠한 뚜렷한 변화를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광산 파업
뉴질랜드의 개혁당이 농민당이라고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던 계기는 뉴질랜드 역사상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1912년에 벌어진 와이히 광부 파업과 1913년 해안가 총파업이었습니다. 파업으로 인해, 기업과 노동자 계층이 둘로 나눠지자, 정부는 투쟁을 벌인 노동자 계층에 맞서 고용주 편을 지지하게 됩니다. 당시 파업을 벌였던 노동자들 가운데 프레스 에반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6개월간의 격렬한 파업이 벌어지고 있었을 때, 경찰들과 노조원들 사이에 충돌로 큰 치명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1913년 해안가 파업으로 번지게 되고, 노조원과 고용주 사이에 다시 한번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수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항구에서 파업을 하는 행위는 농부들이 힘들게 생산한 제품을 해외에 팔 수 없게 되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알렌산더 허드맨 법무부장관이 이끄는 행정부는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수천 명의 특수 경찰들을 구성하게 됩니다. 이 당시 뉴질랜드 전역에서는 최대 1만 6천 명의 노조원들이 파업에 참여하였고, 기마로 된 특수 경찰들 사이에 폭력적인 충돌이 발생하게 됩니다. 정부의 물리적 압제로 인해, 노동자 파업은 결국 우여곡절을 겪으며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기마 특수 경찰들을 이끌었던 마시라는 인물은 많은 노동자들로부터 증오와 적개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제품을 생산하고 있던 농부 계층들에게는 상당한 지지를 얻었으며, 결단력 있는 인물이라는 칭송을 받게 됩니다. 파업을 진행했던 대부분의 노동자계층들은 운송과 무역을 담당했던 사람들로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묵묵히 자신들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농산물들을 만들고 있었던 농부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파업행위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수출로써 뉴질랜드의 경제를 부흥시키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농부들은 많은 제품을 생산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중간에 운송해 주는 사람들이 없다면, 경제 물류 시스템이 원활하게 잘 돌아가지 않습니다. 정부의 강압적인 파업제지는 많은 운송노동자들에게 있어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나라의 경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농부들은 정부가 이렇게 강력하게 파업을 제지해 준 것에 대해 잘한 일로 평가하였고, 결국 뉴질랜드 경제는 다시 재생을 위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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